반도체·AI·로봇·바이오 등 첨단산업의 경쟁력은 기술력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기술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규제를 얼마나 빠르게 바꾸느냐가 기업의 성패와 지역경제의 미래를 좌우한다.
첨단산업 성장 앞에 놓인 규제의 벽
경기도는 대한민국 첨단산업의 핵심 거점이다. 반도체를 비롯해 디스플레이, 바이오, AI, 로봇, 첨단 모빌리티 기업과 연구기관이 집중돼 있고, 제조업은 경기도 지역경제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첨단산업이 성장할수록 경기도가 풀어야 할 규제 개선 과제도 늘어날 수밖에 없다.
최근 경기연구원은 경기도의 첨단산업 활성화를 위해 반도체·디스플레이, 바이오, 첨단 모빌리티, AI, 로봇 등 5개 분야에서 12개 규제 혁신 과제를 제시했다. 연구 개발용 화학물질 관리, 드론 비행 승인, 첨단 바이오 의약품, AI 규제샌드박스, 로봇 인증 등 기업이 현장에서 실제로 부딪히는 규제가 포함됐다.
주목할 점은 ‘규제를 무조건 풀자’는 접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핵심은 위험도에 따라 규제를 달리하고 불필요한 행정절차는 줄이는 것이다.
저위험 기술과 고위험 기술에 똑같은 규제를 적용하면 안전은 높이지 못하면서 기업의 비용과 시장 진입 시간만 늘릴 수 있다. 반대로 위험성이 높은 분야는 더욱 꼼꼼하게 관리해야 한다. 결국 필요한 것은 규제 완화가 아니라 합리적인 규제 혁신이다.
규제샌드박스에서 실증과 제도개선까지
첨단산업 규제는 책상 위에서만 판단해서는 안 된다. 새로운 기술이 실제 현장에서 어떤 위험을 만들고 어떤 효과를 내는지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규제샌드박스와 실증 사업의 역할이 중요하다.
경기도는 신기술을 실제 환경에서 시험하고 데이터를 축적한 뒤 그 결과를 조례와 행정절차 개선, 중앙정부의 법령 개정으로 연결하는 체계를 만들어야 한다. 사전 승인은 합리화하되 사후관리와 책임은 강화하는 방식으로 규제의 무게중심도 바꿔야 한다.
특히 기업이 여러 부서를 찾아다니며 규제 애로를 호소하는 방식에서 벗어나 경기도가 먼저 현장을 찾아가야 한다. 규제는 기업이 문제를 제기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행정이 선제적으로 찾아내야 한다.
경기도형 규제 혁신, 이제 실행해야 한다
이를 위해 경기도는 구체적인 실행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
첫째, 기업 현장을 직접 찾아가는 상시 규제 발굴 창구를 구축해야 한다. 접수된 규제는 법령·조례·행정 절차별로 분류하고 개선 가능 여부와 처리 상황을 체계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둘째, 분야별 전담 협의체를 운영해야 한다. 반도체·바이오·AI·로봇·첨단 모빌리티 등 분야별로 기업과 연구 기관, 전문가, 공무원이 참여해 규제 우선순위를 정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셋째, 규제샌드박스를 실질적인 제도개선 통로로 만들어야 한다. 실증 사업을 허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증 결과를 조례와 행정절차 개선으로 연결해야 한다.
넷째, 중앙정부와의 협업을 강화해야 한다. 경기도에서 해결할 수 없는 법령은 기업 현장 사례와 실증 데이터를 근거로 구체적인 법령 개정안을 제시하고 제도화까지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한다.
다섯째, 규제 개선 성과를 기업 체감도로 평가해야 한다. 단순히 규제 개선 건의 건수가 아니라 기업의 비용과 시간은 얼마나 줄었는지, 시장 진입은 빨라졌는지, 실제 제도 변화로 이어졌는지를 평가해야 한다.
여기에 규제의 정기적인 재검토 체계도 필요하다. 기술과 산업 환경이 달라졌는데도 과거의 규제가 그대로 남아 있다면 주기적으로 폐지·완화·강화를 결정해야 한다. 규제 역시 기술처럼 끊임없이 업데이트돼야 한다.
첨단산업 경쟁력은 규제의 속도에서 결정된다
첨단산업은 규제가 바뀔 때까지 기다려주지 않는다. 기업은 더 빠르고 합리적인 제도를 가진 지역을 선택한다. 경기도가 첨단산업의 중심지라면 규제 혁신에서도 가장 먼저 움직여야 한다.
경기도가 구축해야 할 것은 단순한 규제 개선 계획이 아니다. 기업의 애로를 찾아내고, 실증하고, 규제를 고치고, 중앙정부의 법령 개정까지 이끌어낸 뒤 성공한 사례를 전국으로 확산하는 ‘경기도형 규제 혁신 시스템’이다.
결국 규제를 몇 건 건의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기업이 실제로 체감할 만큼 행정이 빨라졌는지, 새로운 기술이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는지가 기준이 돼야 한다.
경기도는 더 이상 규제 혁신을 검토할 과제로 미뤄서는 안 된다. 현장에서 규제를 찾아내고, 실증으로 검증하고, 경기도가 바꿀 수 있는 것은 즉시 바꾸며, 중앙정부가 바꿔야 할 것은 끝까지 관철해야 한다.
첨단산업 경쟁력은 선언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규제를 실제로 바꾸는 행정의 속도에서 결정된다. 기술은 미래로 달려가고 있다. 이제 경기도의 규제 혁신도 그 속도로 달려가야 한다.
발행인 이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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